박하 - 허수경.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 기억은 세월을 따라 얼마간 변형되었겠지. 변형되지 않았으면 임의로 변조되었거나. 그도 아니라면 나 역시 기억하고 싶은 것만 떠올리는 이기적인 슬픔의 소유자이거나. 아마도 내 기억에 그 장면이 각인된 것은 내가 그때 어떤 영원의 모습을 보았다는 착각 때문일 것이다.

... 아니, 모리슨 씨가 그러더라. 기다리지 말라고. 기다림은 가장 지독한 마약 가운데 하나라고. 그게 버릇이 되면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삶의 내용이 완성되어버린다고.

... 한 도시가 완전히 잊히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러야 하는가. 나는 이스탄불이 언제나 현재형의 도시로, 이 세기 그리고 그 너머의 세기까지 지속되기를 기도했다.

... 가슴이 뛰었다. 모든 미지의 기차들은 가슴을 뛰게한다. 이 기차를 타고 도착하게 될 곳은 아무도 모르는 고대 도시. 인간의 기억 속에서 무참하게 지워진 도시. 그러니 나는 어떤 망각을 기억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것이다.

... 건물은 거의 다 사라지고 몇몇 지반들만 긴 사각형으로 누워 있었는데 돌 위로 드리워진 고요함은 몸서리가 쳐질 만큼 소란했다. 돌의 모서리는 세월 속에서 완만한 곡선으로 변했고 시간 속에 깃든 붉은 이끼는 돌을 절반쯤 점령했다. 돌과 돌 사이에는 키가 작고 거친 가시나무들이 남풍에 흔들리며 침입자들을 경계하듯 바라보았다. ... 기억들이, 아주 먼 기억들이 두근거리는 곳이어서 우리는 다만 조용히 묵념하듯 바라볼 뿐이었다.

... 모든 사랑의 추억은 마음의 벽에서 부조로 살아가는 것이다. ...... 폐허 도시로부터 완전히 멀어졌을 때 나는 중얼거렸다.


작가의 말)
... 언제나 그랬듯, 메일에는 네가 어디에 있다는 말은 들어 있지 않았다. 너는 네가 어디에 있는지 결코 발설한 적이 없었다. 

... 그랬다. 나는 항상 멀리 있었고 너 역시 그래서 우리는 이 생애에서 몇 번이나 만났던가. 그런데도 너는 잊혀질 만하다 싶으면 짧은 소식을 전해왔다. 나는 그게 우리의 인연이거니 생각했는데 참, 다시 생각해보니 이런 행운이 또 있을까. 내가 그리워하는 너는 언제나 너의 소재지를 밝히지 않으니 그게 힘이었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인연을 붙들고 괴로운 것도 괴롭지 않은 것도 아니었던 시간에, 글을 쓰기 위해 오렌지빛 램프를 켜며 책상 앞으로 돌아온 나날들.

책을 한 권 다 쓰고 난 뒤 생각을 해보면 모든 글쓰기의 내면에는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싶어하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그렇다. 19세기 말과 20세기, 그리고 우리가 사는 지금 21세기, 모두를 통틀어서 상처 없는 바람을 안고 간 사람은 없었겠지. 그리고 그 상처의 바람은 가질 수 없었던 것들을 가슴에 품고 헤매는 바람이 아니었을까.

... 그리고 질문 하나. 
너는 어디에 있니?

그 질문을 나는 너에게 하는 질문인 줄만 알고 있었는데 '박하'가 끝나니 결국 그 질문은 이렇게 고쳐 표현해야 맞다는 걸 알겠네. 나는 어디에 있을까? 그 대답을 나는 아마도 영원히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는 늦가을. 비 오는 서울 밤거리를 오래 걷다가 얼마나 이곳은 나에게 낯선가, 생각했지. 그런데도 얼마나 익숙한가, 라고도 생각했어. 낯섦과 익숙함, 이 두 극 속에 우리가 있는 곳과 우리가 동경하는 곳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다시 떠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는 새벽에 다시 너의 메일을 읽는다. 

... 얼마나 생은 아프도록 눈부시고 좋은가. 네가 어느 거리에서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나를 생각하니. 그리고 이 글이 쓰이는 동안, 고백한다. 너를 생각해보지 않은 순간은 한 번도 없었다. 다만 네가 누구인지 나는 몰라서 글 속의 길은 좁고 가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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