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 안개의 풍경 - 스가 아쓰코.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 저녁 무렵 창밖을 내다보고 있노라면 문득 안개가 자욱이 깔리곤 한다. 차에서 5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플라타너스의 가지 끝이 눈 깜작할 사이 자취를 감추고, 끝내 굵은 줄기까지 짙은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가로등 밑을 생물처럼 달려가는 안개를 본 적도 있다. 그런 날에는 몇 번이고 창으로 달려가 짙은 안개 너머를 내다본다.

... 저녁해를 가득 받은 종루의 크고 작은 종들 아래 가로대 위에서 한 사내가 양쪽 손발을 사용해 춤을 추듯, 공중을 헤엄치듯 움직이고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 본 광경이지만 지금도 눈을 감으면 사내의 모습과 함께 그의 온몸에서 솟아나는 듯한, 밀려왔다가 물러가는 파도처럼 여러 겹으로 포개지고 사방으로 흩어지며 축일을 알리는 종소리가 떠오른다. 저멀리 해가 뉘엿뉘엿한 평야를 뒤덮는 연보랏빛 안개와 함께.

... 밤이 깊어가는 내 방의 꽃무늬 소파에 마리아의 이야기가 스며들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 특히 11월의 차가운 안개 속 모래톱 끝에 수묵화처럼 떠오른 그라도의 섬을 방문한 날, 저쪽이 트리에스테라고 일러주는 친구의 목소리에서 은밀한 동경 같은 것을 느꼈다. 남편이 언제 같이 가보자고 말하게 된 것도 그날 이후였던 듯하다.

... 사바가 트리에스테의 길을 노래한 시가 몇 편 있다. 길보다 '거리'라고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유럽 도시의 거리에는 저마다 표정이 있다. 딱 봐도 유복한 사람만 살 것 같은 거리. 낡은 집들이 줄지어 있어 지나가는 사람까지 기가 쇠할 듯한 거리. 혹은 마을 변두리의 신작로로. 아직 이렇다 할 성격이 자리잡지 않은 막연한 길.

... 사바의 시에 나오는 이 길도 전체적으로 어둡고 슬픔이 가득하다. 그런 길도 사바는,

 단 하나, 밝은 가락이 있네

라고 노래했다. 이 거리와 교차하는 몇 갈래 길은 모두 바다와 이어진다. 나는 항구도시에 살아본 적이 없지만, 이처럼 길 끝에 나오는 바다를 '밝은 가락'이라 표현함으로써 라차레토 거리는 일말의 구원을 받고, 태양에 빛나는 파란 바다와 하늘은 시를 읽는 이를 위로한다. 그 파랑은 사바의 파란 눈을 한층 짙게 만들어주었으리라.

... 자기
밖으로 나가, 모두의
인생을 살고 싶다는,
여느 때의 
보통 사람들과,
같아지고 싶은,
바람
....... 이 마을 변두리의
새 길에서, 한숨처럼
덧없는 바람이, 나를
붙들었네

......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달콤하고 공허한
바람에 휩싸였네
따뜻한, 모두의 인생 안에,
내 인생을 끼워넣어,
여느 때의,
보통 사람들
그들과 같아지고 싶다는
바람, 에

- 움베르토 사바, '마을 변두리' 중.

... 이튿날 소나무 숲속 조각가의 집에서 택시를 타고 여름 태양이 눈부시게 비치는 언덕길을 달려 역으로 향하면서 나는 다음에는 혼자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만나거나 뭘 하겠다는 생각 없이 그저 트리에스테의 길을 혼자 걸어보자, 부두에 서서 트리에스테의 바다를 바라보자......

베네치아로 가는 기차는 올 떄와 마찬가지로 깎아지른 낭떠러지 길을 달렸다. 창 너머 멀리 아래쪽에는 하얀 파도가 바위에 부서지고, 여기저기 돛단배가 흩어진, 사바의 눈처럼 파란 바다가 한없이 펼쳐져 있었다. 호메로스, 조이스, 그리고 사바가 사랑한 율리시스의 바다가 여름 햇살 속에 반짝이고 있었다.

... 세월이 갈수록 나는 베네치아가 섬이자 도시가 그전까지 방문한 유럽의 어떤 도시와도 기본 성질이 다르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확신하는 것이 이 도시 자체에 깃든 연극성이다. 베네치아라는 섬 전체가 꾸준히 성행중인 하나의 거대한 연극공간인 셈이다. 16세기 사람인 코르나로가 베네치아에 대극장을 짓기를 꿈꾸었다면, 근대에 들어 외적 성장을 멈춘 베네치아는 스스로를 극장화하고 허구화하는 쪽을 택한 것이 아닐까. 산마르코 대성당의 눈부신 모자이크, 석양에 빛나는 석호의 잔물결, 다리 기슭에서 지저귀는 듯한 여자들의 말소리, 리알토 다리 위에서 잠잠한 물을 바라보는 젊은 남녀들. 이들 모두 세계 극장의 무대장치는 아닐까. 베네치아를 찾는 관광객은 종착역 산타루치아에 도착하자마자 이 연극에 동참하게 된다. 자신들이 도시를 구경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베네치아가 그들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난날 내가 베네치아의 진짜 얼굴을 찾으려 든 것은 잘못이었다. 가면이야말로 이 도시에 어울리는 진짜 얼굴인 것이다.

... 물결 가는 대로, 라는 말을 떠올리고 나는 기묘한 초조감을 느꼈다. 약속 시간에 도착해야 한다는 내 의지가 아닌 물결이, 물이 시간을 정한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이 같은 막연함에 의존하는 베네치아의 시간이, 마치 무대 위의 시간처럼, 여기서만 통용되는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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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실내에 갇혀서 하루종일 일만 하는 요즘, 짬이 날 때마다, 다녀왔던, 혹은 가고싶은 곳에 대한 글이나 영상을 보며 마음을 달랜다. (아마 현실이 지금 같지 않았다면, 오랫동안 버킷리스트에 있었던 베로나 오페라 축제/시칠리아. 혹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났을테다.) 

스가 아쓰코라는 작가를 우연히 알게 되어, 그녀의 책 여러 권을 주문했다. 정갈하고 꾸밈없는 문체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고, 그녀가 이야기 하는 곳에 엮인 내 추억들도 하나하나 떠올라, 읽는 내내 행복하기도 하고 호젓하기도 했다. 길고 긴 해가 넘어가길 따뜻한 마음으로 기다렸던 밀라노 대성당과 스포르체스코 성의 정원에서의 여름날. 까맣게 조용하던, '연극의 막이 내린 듯한' 자정의 산마르코 광장...

ii. 대학교 친구들과 함께 북클럽을 시작하기로 했다. (북클럽 이름은 아직 미정. 후보는 책 읽 아웃, quaranteam 등.) 10년 만에 해 보는 북클럽이고, 우리 모두 성향이 꽤 달라서 어떤 식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미지수이다. 꽤 확고하고도 편향된 독서 취향이 있는 나에게는, 북클럽이 아니면 전혀 읽지 않을 책들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 돌아가면서 읽을 책을 추천하기로 했는데, 내 차례가 되면 무슨 책을 권할지 고심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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