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 허수경.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 새벽에 떠오르는 해를 맞으며 발굴을 시작할 때 저는 수없이 깊은 숨을 들이쉬곤 했습니다. 과거를 발굴해서 어제의 사실을 좀더 명확하게 밝히는 일이 우리의 실존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우리의 실존이란 사실 오늘의 일만으로도 힘들어서 허덕이는 게 아닌지, 그런데 어제라니, 그것도 4000년 전이라니.....

... 거대한 기념물은 그 기념물대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거대한 기념물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평범한 생활이 그안에 있었고 많은 사람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 어느 한때 우리가 자주 얼굴을 보고 살던 시절, 그리고 자주 얼굴을 보지는 않더라도 지상에서 맺은 인연을 기억하면서 살 때, 우리를 맺어주던 작은 기억들, 그 기억을 우물거리는 술을 조금 마시고 일찍 잠을 깬 새벽녘, ...

... 나는 내가 태어나서 어떤 시간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이 고맙다.

... 유물은 어디까지나 유물이고, 그 물건들을 만들고 사용했던 사람들은 이 세계에 남아있지 않다. 고고학이라는 학문은 그래서 현실 정치적인 상황에 민감한 것이다. 고고학의 사실이 현실 정치의 선전물이 되는 것을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 그 민족의 문화적인 자존심이라는 명목 아래 잘못 해석되고 이용되는 것이다. ... 고대부터 오리엔트 지방에 살아온 많은 민족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해체되거나 다른 민족 집단에 흡수되거나 사라진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 또다른 집단들이 들어오고 그곳에서 살아간다. 사람들은 움직이고 살고 죽고, 또다른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살고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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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어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가, 몇 달 전 참석했던 학회가 떠올랐다. 지난번 이라크 프로젝트로 인해 알게 된 K의 발표가 있었는데, K가 메소포타미아문명의 전문가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세부적으로 cuneiform을 심도있게 연구 중인 것은 몰랐었다. 나는 잘 모르는 분야이지만, (분명한 한계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주제에 대한 K의 열정과 진심이 너무나도 와닿아 굉장히 인상 깊었던 기억이다. 

허수경 시인의 글을 읽으며, 그 한계와, 그에 대한 회의와, 그럼에도 남아있는 열정들이 뒤섞여 다가와 K가 문득 떠올랐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리 새로운 일들이 많지 않지만, 종종 '이러한 직업을 가진 사람도 있구나!'하고 놀라고, 감탄할 때가 있다.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 앞에서도, 묵묵히 그들이 자신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을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세상에 누군가는 '시대의 소음'에서 멀어져, 그 무엇이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어떻게든] 도움이 되는' 일을 꾸준히 해 나가고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내겐 위로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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