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봄. rambling.


전세계인 대부분이 겪어보지 못했던 시간들을 살고 있다. 불확실성만이 유일하게 확실한 것으로 남아있고, 진부하게 느껴졌던 일상의 풍경들을 모두 그리워하고 있다. 

실내에서만 이루어지는 하루 일과는 더욱더 단순해졌고, 2주일에 한 번 장이라도 보러 나가면 괜히 긴장이 된다. 마스크를 쓰고도 (드디어 이곳 사람들도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숨을 괜히 참게 되고, 나를 비롯한 모두의 행동은 전례없이 민첩해졌다. 

업무량은 전혀 줄지 않았고 -오히려 배가 되었고 (이 사태로 인해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 펀딩에 문제가 생겼는데, 그 프로젝트의 빈자리를 돌아볼 틈도 없이 바로 새로운 업무가 주어졌다)- 모두 재택근무를 하는 관계로 정말 '언제라도' 회의가 열리고 있다. 시차를 고려하여 회의 시간을 잡아보아도 아침 7시에 시작이거나, 밤 10시를 넘긴 시간이니 하루 루틴은 일-식사-일-취침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과도한 업무량에 치이고 있지만 이 시기에 전혀 불평할 것이 못된다. 사실 일에 치이고 있지 않으면, 지금 상황에 나를 지배할 것은 아마도 회의감이나 엄청난 무력감일테니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조금씩 짬이 나도, 책을 읽을 마음이 나지 않았고, 수십- 백 개의 이메일을 주고 받고, 보고서를 작성하다보면 그 어떤 다른 글을 쓸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L이 책을 주문해 보내왔다. 나는 책 주문을 한 적이 없건만, 한참 갸우뚱 했는데, 내가 동굴 속으로 들어갈까봐 걱정이 된 건지 고맙게도 책을 보내주었다. 예전에 한 번 접하고, 다 읽지 못한 채로 도서관에 반납을 했던 적이 있던 책인데, 시간이 나는대로 찬찬히 읽어봐야겠다. 고마운 친구다.

그래서 오랜만에 블로그에도 글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 특수한 상황을 살면서, 내가 남기는 유일한 흔적들이 그저 이메일과 보고서라면 그건 그것대로 슬플 것 같다.) 일기도 따로 쓰지 않고, 다른 SNS 활동도 전혀 하지 않는 내게 블로그는 특별한 공간이다. 하고 싶은 말을 항상 다 쓰지는 못했지만, 작성한 모든 글들과 사진들은 늘 내 진심이었고, 그러한 진심과 순간들을 남겨둘 공간 하나 정도는 있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오랜만에 예전 글들을 톺아보니, 좋은 추억들이 많이 상기된다. 그리고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들도 마음에 들어온다. 그 중 유난히 다가오는 글귀 둘. 

... 아, 이러한 풍경은 고맙다. 영원히 지속되고 싶은 한 인간의 사적인 역사가 소리소문 없이 일상의 쳇바퀴 속에서 얌전하게 도는 시간들. 이 시간이 고마운 줄 우리는 너무나 늦게 안다. 이 질서가 깨어져야만 우리는 이 질서가 우리 삶에 어떤 의미에서는 살 만하게 했다는 걸 깨닫는다. -허수경의 '너없이 걸었다' 중.

... 그때 나는, 이 진부한 삶의 끝없는 순환에 안도하였다. ... 진부하게, 꾸역꾸역 이어지는 이 삶의 일상성은 얼마나 경건한 것인가. 그 진부한 일상성 속에 자지러지는 행복이나 기쁨이 없다 하더라도, 이 거듭되는 순환과 반복은 얼마나 진지한 것인가.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 중.


그 진부하고, 얌전하게 도는 일상이 언제나 다시 찾아올지 모르겠다. 그때까지 나는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지내야겠다. (사실 the world/life as we knew it...은 다시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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