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없이 걸었다 - 허수경.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 낯섦을 견뎌내는 일은 걷는 것 말고는 없었다. 걷다가 걷다가 마침내 익숙해질 때까지 살아낼 수밖에는 아무 도리가 없었다. 그 순간, 이 도시에는 꽃도 피다가 졌고 누군가는 사랑을 하다가 헤어졌으며 그럼에도 그 사랑은 언제나 반복되었다. 그걸 알게 되었다, 독일어로 쓰인 시를 읽으며 걸었던 거리에서. 인간은 어디에 있든 얼마나 작고도 하잘것없으며 그러나 얼마나 특별한 개인인지도.

... 그대들이 없는 도시는 서먹했으나 어느 순간 나는 모든 어두컴컴한 골목에서 내 기억과 함께 그대들을 마주쳤지요. ... 그래서 조금은 쓸쓸한 휘파람을 불며 다시 걸었지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나 그대들이 있어서 조금은 특별한 사람이었던 적도 있었다, 는 멜로디를 가진 휘파람을 불며...... 멀리 있으니 우리들은 서로에게 별이겠지요. 그래서 더 촘촘히 그립고 밤이면 구름이 없어 별빛을 오래 보며 다시 걸었으면 했네요.

... 아우스터리츠는 그래서 시간과 공간의 관계는 오늘날까지 어떤 착각적인 것과 환상적인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바깥에서 돌아오면 결코 확실하게 알 수 없지요. 우리가 정말 떠난 적이 있었는지."

... 보리수나무 그늘. 모든 것이 변하고 떠나도 그 자리에 서있는 어떤 중심. 다시 방랑의 길을 가는 모든 낭만주의자들의 아픔과 고적함을 상징하는 나무. ... 그 나무 밑에서 오래된 노래를 흥얼거리며 내가 떠나온 중심에 대해, 내가 그립다고 생각하지만 절대 그리움을 발설하지 못할 장소와 사람에 대해 나는 자주 생각하곤 했다. 원치 않았던 이별과 길에서 만났던 수많은 여관들과 낯선 사람들. 다시 찾아올 이별과 사랑 같은 것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당신이 있었다. 내가 누구라고 정의할 수도 없는 당신이. 너무나 흐릿하고 아득해져 이제 당신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당신이. 멀리서 불러본다, 당신이여...... 당신은 이 보리수 앞에 아직 서 있는가. 나를 기다리라고 바랄 수는 없다.

... 아, 이러한 풍경은 고맙다. 영원히 지속되고 싶은 한 인간의 사적인 역사가 소리소문 없이 일상의 쳇바퀴 속에서 얌전하게 도는 시간들. 이 시간이 고마운 줄 우리는 너무나 늦게 안다. 이 질서가 깨어져야만 우리는 이 질서가 우리 삶에 어떤 의미에서는 살 만하게 했다는 걸 깨닫는다.

... 비가 내리는 날, 호수 앞에서 너를 생각할 때가 참 많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오가는데 너와 똑같은 사람은 이 세계 어느 곳에도 없다. 그대의 웃음을 한 번만이라도 다시 들을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 웃음소리는 내가 이 지상에서 들었던 모든 소리 가운데 가장 희미하고도 연해서 금방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것도 마왕의 유혹이었노라 너는 농담을 할 수도 있겠지만.

... 창문을 열고 바깥을 바라보니 하늘에는 별이 총총했고 집 뒤에 있는 숲에서는 여름 라일락의 향기가 들판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문득 그가 더이상 갈 수 없는 곳이라 생각한 데가 그가 사랑하는 시리아에 있는 그 고대 도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라일락의 향기를 잡으려는 듯 손을 바깥으로 펼쳤다. 바람이 불어도 그쳐도 향기는 계속 나는데 잡을 수가 없었다. 꿈과 인간의 관계 같았다. 꿈을 본 것 같아서 잡으려 할 때마다 잡히지 않는 꿈. 향기 역시 잡으려는 인간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 그냥 지나친다. 다만 향기만이 있을 뿐이었다. 모든 살아온 장소들이 어쩌면 지나간 꿈이거나 다가올 꿈은 아닐까 싶었다. 라일락 향기 속에 밤하늘의 별들은 하염없이 빛났다. 저 별에도 우리는 갈 수 없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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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있는 동안, 혼자 길을 나설 때마다 이 책을 꼭 챙겨나갔다. 어쩐지 내게 있어 늘 독일은 세피아톤의, 시대의 우울을 품고 있는 이미지이다. 언제나 스카프를 하나 목에 두르고, 언제 김동률이나 김연우를 들어도 어울리는 곳. 
그런데 이번에 독일에 머무는 동안에는 유례없이 덥고 화창한 날이 이어졌다. 차분하게 시인이 들려주는 뮌스터 골목골목의 이야기와 어쩐지 동떨어진 활기찬 여름의 풍경. 그래서 여름햇살이 잠시 숨어있을 때마다, 책을 꺼내 조금씩 읽었다. 그래야 '너 없이 걸었'던 그녀의 적적함을, 무겁고 아쉬웠을, 그리움이 배인 발걸음을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제 애쓰지 않아도 그녀의 목소리가 세피아톤의 풍경에 녹아드는 계절이 다가왔지만, 나는 또 이렇게 그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조금 아쉽고, 그곳의 가을이 아주 많이 그립다. 나도 참 많이 걸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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