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terbury. 순간을 믿어요.


Chaucer의 Canterbury를 찾아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내가 좋아하는 기차 여행, 일찌감치 기차역에 도착하여 목적지와 플랫폼을 알려주는 안내판만 봐도 마음이 두근거렸다. 기차를 타고 브뤼헤로, 파리로, 암스테르담으로. 기차를 타고 너무나도 쉽게 국경을 넘나들었던 학생 시절이 떠올랐다. 지금은 그저 아득하게 멀리 느껴지는 그 시절. 희미하고 멀리 느껴지더라도 사실 난 여전히, 변함없이 그때의 풍경이 내 일상의 배경이 되길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 그렇게 된다면 훌훌 다 던져버리고 떠날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음. 물론 그걸 실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겠지만.

작은 가방 안에는 물과 작은 수첩과 펜이 들어있다. 휴대폰으로 (또) 윤상의 노래를 재생했다. 잿빛의 낮은 하늘 이곳에선 계속 윤상의 음악을 찾게 된다. 목소리를 색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윤상은 이곳의 회색의 하늘빛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창문 밖 빠르게 지나가는 모든 풍경 앞에 '낭만'과 '운치가 있는'이라는 표현을 붙여도 될 것 같은 날씨다. 누군가는 '쓸쓸'이나 '우울'이란 단어를 대신 고를지도 모르겠다.

기차에서 내려 정처없이 걷기 시작한다. 충동적으로 떠나온 이번 여행 만큼이나, 늘 계획 없는 내 여행길. 정처 없이 걷다가 마음에 드는 풍경을 만나면 오래 머무르면 되고, 그게 아니면 발걸음을 옮기면 된다. 그만큼 더 발품을 팔아야 할지도 모르지만, 워낙 걷는 것도 좋아하고, 또 뜻밖의 아름다움을 늘 만나게 되어 도저히 고쳐지지 않는 여행 습관이다. 예기치 못한 선물 같은 순간들이 포기가 안 된다. 걷다 배가 고파지면 근처의 아무 곳이나 들어가 배를 채운다. 행여나 미리 학습하지 않아 놓친 명소가 있으면 훗날 다시 그곳을 찾을 이유가 생기게 된다.

내딛는 발걸음 마다, 도시가 간직한, 오랜 시간동안 켜켜이 쌓아놓은 중세의 순간들이 묻어나오는 것 같다. 지나치는 작은 카페도 수백 년의 역사를 조금은 수줍게 자랑하고 있다. 순간, 내 자신이 'right place'에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한동안 많이 그리웠던 그 기분. 바람이 조금 거세지기 시작했지만, 역시 잘 왔다는 생각이 들고, 도시의 오래된 도서관을 구경했다.

이탈리아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B는 로마인의 도시 Londinium-London을 좋아했다. 이곳 Canterbury도 로마인의 도시(Durovernum Cantiacorum)였어서 흔적이 남아 있다. (사실 조카가 아니었으면, 난 아마 이탈리아행 표를 끊었을 것만 같다.)

Canterbury 대성당은 보수공사가 한창이었지만, 정말 웅장하고 멋졌다. 세상의 유명한 성당은 적지 않게 본 것 같은데, 이러한 건축물은 여전히 마주할 때마다 압도당하는 기분이다. 멋진 스테인드글라스와 또 멋진 회랑. 조용한 회랑이 좋아, 천천히 두 바퀴를 거닐었다.

성벽을 따라 한참을 걷다가, 낮은 하늘에 실려 온 억센 비바람을 피해 이곳에서 pasty를 처음 만들었다는 성당 옆 베이커리에 들어갔다. pasty 대신 뜨거운 커피 한 잔과 피스타치오 파운드 케이크 한 조각을 시키고, 몇 장의 엽서를 썼다. 

기차역으로 돌아가는 길, 중세도시의 곳곳을 천천히 눈으로, 마음으로 훑으며 무의식적으로 또 기도를 했던 것 같다. right place에 있다는 느낌을 다시 느끼며 일상을 살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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