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도시 - 허수경.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 나는 그때 이 세상에는 이해라는 방식을 통하지 않고도 그냥 전해져오는 사람들 사이의 느낌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나는 그를 잘 모르고 그를 이해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자꾸 슬픔으로 잠겨들어갔던 것 같다.

... 그는 나를 안아주며 다시는 오지 말라고 했다. 너무 일찍 많은 걸 알게 되면 삶이 쓸쓸해진다는 말을 하면서.

나는 이 이야기를 그녀에게 한 적이 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자신도 그와 비슷한 한 사람을 안다고 했다. 그는 시간 속에서 영원히 실종되어버린 사람이라고 했다.

... 닫힌 세계에 사는 사람들을 나는 이상하리만치 신뢰를 하는데 그것은 할머니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아주 조금 받아들이며 조금 받아들인 것을 일생을 통하여 씹고 되씹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언제나 묘한 감동을 준다. 그들은 받아들인 아주 조그마한 것들을 마음속에서 삭이고 삭여 황홀한 것들을 만들어낸다. 할머니가 구운 케이크 위에 있던 것들, 일테면 버터와 밀가루를 섞어 불에 얼마만큼 올려두었다가 몽게몽게한 작은 덩이를 만들어 빵반죽에 올려놓고 구우면 황금색으로 향기를 내는 것들. 닫혔다는 것은 내부로의 집중과 몰입이라는 말에 다름아닐 것이다.

... 나는 그 무엇에도 동의할 수가 없다. 그러려고 그랬던 건 아니다. 그냥 이렇게 되어버렸다. 그 무엇에도 동의할 수가 없을 때 사람은 떠나야 하는 건 아닐까. 어디로? 사람은 정말, 어디론가 떠날 수 있는가. 떠난다는 건 무엇인가. 이 거리에서 살던 사람이 저 거리에서 살게 되거나 길거리에서 잠을 자게 되거나 하는 그런 것? 만일 내가 떠난다면, 나는 그 어딘가, 길거리에서 낯선 방에서 새로운 문장을 찾게 될까.

... ㅁ시에 봄이 오고 여름이, 그리고 가을과 겨울. 일테면 계절의 빛과 향기를 나는 단 한 번도 제대로 흠향해본 적이 없었다. 모든 현재의 시간들은 과거의 시간에 겹쳐져 현재를 이루었으므로 나의 시간은 과거의 것도, 현재의 것도 아닌 시간으로 ㅁ시를 떠돌았다.

... 기억이라니, 그 한철이 이렇게 많은 그림과 향기로 남다니. 그리고 그 한철이 또한 어딘가에 두고 온 낙원 같다니.

... 나는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이곳을 떠날 때가 가까워졌다는 생각을 중간중간에 하면서 나는 슈테판을 바라보며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문득 그가 측은해져서 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내가 지금 그를 쓰다듬어준다면 그가 또 어느 날 내가 쓰다듬어주던 그날을 마음에 넣고 두고두고 넣어다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를 쓰다듬어주어서는 안 되었다. 내가 모래도시에 있을 적 '너'가 나에게 보내주던 그 위로는 따뜻한 것이기는 했지만 여기에 사는 나를 얼마나 담담하지 못하게 했던가. 지상에서 누린 모든 따뜻함에는 그 대가가 있는 것. 제 몫의 대가를 치르며 '너'와 나는 혹은 그는 살아야 하는 것이다.

... 그리고 .... 또하나, 나의 이율배반. 아마도 나는 그런 고문헌 따위가 전쟁이라는 괴물에 시달리는 나를, 혹은 우리를 구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현세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아무데도 쓰일 곳이 없는데도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쓸모 있는 것만 살아남는 이 세계를 얼마나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는가. 나는 그런 매력 앞에서 또한 당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 내가 이 먼 여행을 한 것은 '머나먼 곳'이라 불리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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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는 일에 큰 애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또 나를 힘들게 한다. 세상의 대부분의 것들처럼 이율배반적이기도 하고. 개인적의 삶과 공적인 일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이러저러한 생각들이 더 높은 분들의 입을 빌려 전달되어야지만 의미가 있을 때, (혹은 없을 때), 머리에는 '지난하다'라는 단어가 계속 벌처럼 붕붕거렸고 지친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 나는 여전히 많은 것에 의연하지 못한지, 왜 추구하는 가치와 삶의 풍경이 늘 일치하기를 (아니면 적어도 조화와 균형을 잃지 않길) 포기하지 않고 쓸데없이 스스로 짐을 지우는지.

자는/쉬는 시간을 쪼개어 허수경 시인의 글을 또 찾았다. 내 생각과 마음을 대변해 주는 글에 위안을 얻고 고마움을 느끼다가. 벌컥 떠날 표를 샀다. 굳이 또 따져본다면 떠날 이유 몇 가지를 생각할 수 있지만, 일단 이런 저돌적인 면모는 스스로도 매번 당황스럽다. 대체로 평온하고 특별할 것 없는 나의 나날에 불쑥불쑥 찾아오는, 불청객 같은 저돌함. 그런데 또 돌아보면 나의 나날들을 나름 흥미롭고 다채롭게 만들어 준 것의 팔 할은 (용기로 둔갑한, 그리고 '낯선 곳으로 과감히 떠난다'라는 범위로 극히 한정된) 저돌함이 아닐까 싶고, 그러면 나는 이 내재되어 있는 나의 불청객을 앞으로도 종종 환영해야 하는지 싶고, 그러다보면 '머나먼 곳'이라 불리는 당신을 만나게 되는 걸까 궁금하고.



덧글

  • 2019/02/25 16:2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9/02/27 07:2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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