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발굴지에 있었다 - 허수경.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수없이 파괴당했던 바빌론,
누가 그곳을 그렇게 수없이 다시 건설하는가. 
-베르톨트 브레히트.

... 누구든 잊힌다. 공룡도 그러했거니와 인간이라는 종도 언젠가는 잊음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다. 모두가 모두에게서 잊히는 것은 어두우며, 어둠은 견디기 힘들다. 우리는 잊음이라는 불길한 딱지를 지니고 이곳 지상으로 왔으나 잊음, 혹은 잊힘에 저항하는 존재도 우리가 아닌가. 공룡들은 그들의 종의 역사를 기록하지 못했으나 인간이라는 종은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의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잊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역사를 기록하는 존재는 역사를 기록하지 않는 존재보다 약하다. 그 약한 존재인 나는 기록되지 않고 잊힐 폐허 도시 앞에 서 있다. 그러나 브레히트의 말대로 누가 그렇게 수없이 파괴당했던 바빌론을 다시 건설하는가.

... 휴일, 아무도 없는 폐허지를 산책하다가 그늘에 앉아 물을 마시며 내가 판 텅 빈 무덤을 바라보노라면, 글쎄, 그 죽음이라는 것, 그리고 살아간다는 것이 냄새가 있고 없고를 넘어 다정하게 어깨를 겯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쓸쓸한 것은 어떤 실험실도 내가 기억하는, 유럽인들이 시암바질이라고 부르는 방앗잎의 냄새를 뼈에서 찾아낼 수 없을 거라는 것, 살아 있다는 것이 그래서 그렇게 즐겁다는 것도. 혹은 죽은 뒤가 되면 어떨까, 물고깃국을 함께 먹던 식구들의 그 등을 나는 기억할까. 아마도, 저 돌처럼 딱딱해진 곡식알과 대추씨처럼, 그렇게.

... 고고학적인 사실, 이라는 거창한 말 속에는 발굴의 우연이라는 작은 괄호가 언제나 들어 있기 마련이다. 어떤 유적터는 다른 유적터보다 많은 유물을 안고 있으며 또 어떤 유적터는 자신의 과거를 발설하는 아무런 유물을 전해주지 않는다. 아무리 찬란한 과거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발견되지 않는 과거는 고고학적인 사실로 들어오지 않는다. ... 고고학적인 조사를 통하여 얻어지는 과거는 그러므로 언제나 잠정적인 결론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고고학적인 결론이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혹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이라는 단서가 붙여진 결론이다.

... 고대인은 어떤 내면을 가지고 있었는가, 를 추정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닌데 감히 고대인을 이해하려고 하다니, 어쩌면 그 생각마저도 가소로운 일이 아닌가 싶다. 유적터에서, 고대인이 사라진 그 자리에서 그들이 쓰던 물건들이나 집터를 발굴할 수는 있으되 그들의 마음은 발굴할 수가 없었다. 과거는 다만 현재를 살아가는 나를 통해서 해석되어지는데 현재를 살아가는 나란, 다만 나와 시대의 한계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 기록이 남아 있으므로, 그 기록을 재구성해서 나열해놓은 후대의 역사 기록이 있으므로 그 기록을 읽을 '시간이 있던' 한 사람은 마치 역사를 취재하는 기자처럼 그 역사,를 적어 내리려고 한다. 경험하지 않았던 일을 경험 가까이로, 이를테면 체험의 맥박 가까이로 끌어드리려 한다. 그리고 부질없다,는 생각.

... 고향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자신의 빛을 당대성으로만 증언하는 꽃 앞에서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아마도 이 질문은 빛이 들어오지 않는 구석방으로 들어가 제 속이 스스로 빛을 만들어주기를 바라며, 그리고 그 빛이 제 속을 비추어주기를 바라며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꽃빛 앞에서 스스로를 세계 시민이라고 믿는 그는 우르 제3왕국이 망하고 난 뒤 수메르인들은 어디로 갔을까, 하고 묻는다.

... 고향이 겪어내는 당대성을 같이 경험하지 못하는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이주자 가운데 하나인 이 '시간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구체적인 당대성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그 꽃빛일까, 그 꽃빛 아래 어찔해서 말을 잊고 한 생애의 오후를 정지시키는 그 마음일까. 그 마음의 주인은 누구일까, 어떤 대륙도 주인을 가지지 않았는데, 누구도 어떤 한뼘 땅의 주인이 될 수 없는데... 오, 오, 이동의 역사여,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게 하라.

... 거대한 유럽 박물관들의 '지상층'은 이런 현실 정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그런 현실들이 박물관의 유리창을 통하여 전시실을 비추면 그 안에 보여지기 위하여 앉아 있는, 혹은 서 있는 많은 물건은 정치권력의 허깨비처럼 보이기도 한다.

... 10여 년 이라는 세월도 나 같은 작은 인간에겐 버거운 시간이다. 그런데 2,000여 년이라는 시간은 무엇인지. 고작 내가 살아가는 생애만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시간이며 지나간 시간을 해독하는 것도 버겁고 앞으로 다가올 시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고고학을 하는 인간의 내면에는 이미 인간들이 살아낸 시간, 그리고 고고학을 하는 그 자신이 살아가지 않은 시간을 재구성하려는 의지가 숨어 있다. 그 재구성은 그리고, 그 시간이 남겨놓은 물질적인 증거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 남겨진 견고한 물질만이 1차 자료로 들어오는 고고학적인 방법이라는 것이 (비유로서의 고고학적인 방법이 아니라), 실은 무엇을 말할 수 있을런지, 견고한 물질만이 생물학적인 조건을 지난 것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다. 그 앞에 겸손하게 설 수는 있으나, 그 앞에 서는 나라는 존재는 너무나 작다. 나는 생물질로 이루어진 존재다. 그리하여 짧음은, 내 존재의 기반이다. 나는 내가 살아가는 그 세월만큼의 길이나 무게나 부피로 사유한다. 만일 나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인자가 200년 정도 내 수명을 늘린다면, 어떤 생각을 하면서 나는 생의 순간순간을 넘어갈까.

... 그러나 한 인간으로서 너른 우주에 던져진 한 시인은 무엇을 듣고 있는가. 그리고 그 시 안의 순간들과 그런 것들이 번역되지는 않으나 존재할 권리. ... 그 순간들이 이 지상에 존재할 수 있는 권리를 시로 붙잡아둔 한 시인의 순간들. ... 번역되지 않는 순간들을 껴안는 시인들에게 평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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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바빌론, 니네베, 바알베크, 팔미라 등의 지명들이 심리적으로 친근해졌을 때, 허수경 시인의 글을 오아시스를 구하듯 찾았다. 그곳에서의 사유를 풀어놓은 그녀의 차분한 글들은 정말이지 한없이 쓸쓸했다. 묵직한 그녀의 사유의 순간들이 결코 친절하지 않은 모래바람에 실려, 잊혀진 고대 도시 곳곳을 훑었을 시간을 생각하면-- 나도 함께 쓸쓸하고 황량해 진다.

ii. 그래서 결국 구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고고학적인/역사적인 사실도 중요하지만, 나는 옛 것을 마주하면서 세상을 살아가고 다른 것(이)을/를 좀 더 포용하고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 같다. 한때 찬란하고 장엄했던 것들의 뒷모습에서 느끼는 것은 겸손과 무상이다. 결국 시간의 지층에 묻히고, 모래바람에 휩쓸려 갈 모든 것들인데, 굳이 날을 세우고, 존재를 확인 받고, 애써 소유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iii. 나 역시 번역되지 않지만, 존재할 권리를 가진 순간들을 사랑한다. 시인들과 달리, 그런 순간들을 그저 마음으로 끌어안고 오래도록 보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지만.

iv. 천부적인 우울과 채워질 수 없는 쓸쓸함이 글 전체를 아우러서 읽는 내내 마음이 아프고, 또 끌렸다. (어쩌면 '지금'의 날들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 자꾸 옛 것에 마음을 기대셨던 걸까, 나처럼... 이라는 생각도 주제넘게 해보았고...)
너무 빨리 다른 시간의 지층 속으로 떠나버린 분. 그 곳에선 따뜻함과 평안함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거기에선 이방인일 필요도, 세계 시민일 필요도 없을 것 같아요.)

v. '그 곳은 걷는 걸음마다 과거가 숨을 쉬고 있어, 네가 분명히 좋아할 거야.' ---기회와 인연이 닿으면, 또 새로운 곳에 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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