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중순. rambling.


i. D에게 Emil Cioran을 다시 시도해볼까, 하고 얘기를 하다가 (내게는 생소한) Mircea Eliade를 추천받았다. 그리고 조금 무거워진 주제에서 곧 벗어나 미드 Legion을 추천받았는데, 알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Dan Stevens가 주인공이었다. 톤은 많이 다르지만 제레미 아이언스만큼이나 멋진 영국 억양과 목소리를 지닌 배우이다. (영문학도였던 그가 녹음한 오디오북은 일품.) Legion에서는 캐릭터를 소화하느라 살을 너무 많이 빼서 못 알아보았는데, 아무튼 그렇게 어이없게 Downton Abbey를 떠난 후, 여러 가지 배역을 시도하며 연기의 폭을 넓혀가고 있는 것 같다. (그가 샬롯 갱스부르와 함께 출연한 Norman/Oppenheimer Strategies는 봐야지, 봐야지하고 미루다 영화관 상영이 끝나버렸다..)

ii. 그렇게 얘기를 하다가 제멋대로인 연상기법 덕분에 차우셰스쿠를 떠올렸고(에밀 시오랑-루마니아-차우셰스쿠...), 흘러 흘러 기억이 날 데려간 곳은 11년 전 찾아간 스페인 엘 에스코리알의 전사자의 계곡(차우셰스쿠-독재-프랑코-전사자의 계곡)이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숨진 이들을 위해 조성되었지만, 역설적으로 프랑코의 무덤이 함께 자리한 곳. 추운 겨울, 택시를 타고 일부러 높은 산 중턱에 위치한 그곳을 찾아가던 길,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십자가는 멀리서도 그 무게감을 한껏 과시했다.

택시에서 내려 가까이에서 마주한 곳. 방금 보고 온 화려한 궁전에서 느꼈던 아름다움이나 감동을 멀리 날려버릴 정도의 대단한 위압감으로 단숨에 기가 눌려버렸다.

황량하고 음침하기까지 한 그곳에서- 장소가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하다고 생각했다. (많은 경우) 승자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을 곳들을 우리는 얼마만큼 수용하고, 용인해야 하는 걸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사실에 근거한 해석과 교육과 적절한 보존일까. (스페인에선 프랑코 무덤을 이전하라는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장소의 무거움에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아, 일부러 찾아간 시간과 노력이 애석할 만큼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iii. 그렇게 또 기억의 실타래가 풀리고 풀려서- 우리 둘 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배낭여행을 떠났던 곳이 스페인이었다는 사실에 필요 이상으로 의미를 부여하며, 어쩌면 그때 우연히 마주치지 않았을까- 하고 들떠 사소한 것에도 설렜던 옛날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우연이 운명으로 둔갑하는 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다.

iv. 그땐 그랬지, 하고 공상을 하다가, 가지 않은 길들도 생각했다. 즐거웠던 방송반의 추억을 떠올리며 TV production 수업을 신청했던 11학년 시절. 첫 수업부터 카메라 작동법을 배우고, 다음 주에는 무엇을 찍어 편집해 오라는 과제를 받았다. 그런데 대학입시를 앞두고 일부러 다른 학교로 가서 한 주에 꼬박 5시간을 희생(?)하는 것을 큰 도박이라고 느꼈고, 결국 난 자진해서 2주일 후 AP Statistics 같은 거로 스케쥴을 다시 짰다. (그리고 그해 AP 시험은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 수학을 4과목이나 (Stat, Calc AB, Calc BC, IB math HL I) 치렀다.) 후에 대학 크레딧 인정이나, 전공수업에는 AP Stat 등이 분명 도움이 되긴 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때의 내 결심과 한없이 좁았던 내 시야가 그저 많이 아쉬울 뿐이다. 그때 난 정말 그게 맞는 길이라고 생각했었다.

v. Sarah Bakewell의 At The Existentialist Café: Freedom, Being, and Apricot Cocktails을 정말 재밌게 읽고 있다.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를 중심으로 실존주의와 범주에 있는 철학자(까뮈, 하이데거, 후설, 야스퍼스, 메를로 퐁티 등)들의 삶들을 함께 풀어낸 책인데, 적당한 깊이로 관련 철학 이론과 발전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간간이 등장하는 작가 자신의 생각도 좋고... 그들의 삶과 시대적 상황을 토대로 발전하게 된 생각들을 읽다보면 어쩐지 그들을 더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것 같은 착각도 들곤 한다. 사르트르가 '구토'를 쓰려고 어지럼증을 안고도 시도한 실험이라든지, 사랑을 듬뿍 받고 곱게 자란 매너남 메를로 퐁티가 보부아르와 연인이 될 수 없었던 이유라든지... 또 나치즘에 대한 그의 침묵을 다른 시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주어, 하이데거에 대한 나의 개인적 비호감을 약간 누그러트릴 수 있는 것이라든지... 읽다 보면 나도 2차대전 전/후 파리의 Cafe De Flore에 앉아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까뮈에 대한 내 애정을 재확인했고, 시몬 베유는 좋은 발견이었다.

vi. 읽으면서 얻고자 하는 것은 '그래서 결국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내/우리 삶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는가,'이고, 정답은 아니더라도 약간의 방향성을 부여받게 된다. 그럴 때면 나름의 만족감과 행복을 얻곤 하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나의 이런 행복이 합당한 걸까,하며 종종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나에겐 현실적/실질적/실존적인 고민이지만, 주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어쩐지 내 고민과 생각들이 하나의 뜬구름으로 하향조정되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누구의 고민이 더 가볍고 무겁고는 타인이 단정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사회적인 틀에서 다음 단계로 자꾸만 넘어가는 사람들은 그들의 고민이 '보다 현실적'이라고 하고, 나 역시 그 길에 기꺼이 동행하며 같이 고민할 것을 종용한다.

그런데- 아마 난 앞으로도 이런 내 행복을 쉽게 포기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그게 결코 이기적인 선택이 아니라는 걸 더 잘 전달할 수 있으면 좋겠다.

vii. 좋아하는 컵. 캘리포니아의 덴마크마을인 Solvang의 기념품이지만 어쩐지 델프트 블루의 네덜란드 소녀가 빚어져 있다. (이방인의 정체성 혼란을 엮어서 표현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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