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초. rambling.


i. 한동안 연락이 끊겨서 걱정이 되었던 친구 커플. 학회 전날, 근처를 지나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들이 예전에 살던 집을 찾아가 보았다. 그리고 아직 우편함에 남아있는 이름들에 안도를 하고, 벨을 눌렀다. 누구냐고 묻는 질문에 최대한 자연스럽게 이름을 말했다. 정말 너니?- 스피커로 전해오는 놀라움. 그도 그럴 것이 2년 반 만에 아무 말도 없이 쑥 나타났으니. (연락이 끊긴 건 반 년 전이지만, 그때만 해도 내가 학회에 참석하게 될 지 몰랐으니 방문에 대한 얘기는 전혀 없었다.) 문을 열고 나를 마중나온 것은 친구 커플의 아들 K.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새근새근 유모차에서 자고 있었는데, 이젠 어엿한 사랑스러운 어린이가 되어 있었고, 대화를 많이 하는 자상한 부모인 친구 커플 덕에 나이답지 않은 굉장히 우수한 어휘력을 선보였다.

나를 보고 놀라움에 말을 잇지 못하는 친구 커플. 나는 우선 정말정말 혹시하는 마음에 들린 것이라며, 이렇게 불쑥 찾아온 것을 사과했다. 고맙게도 친구 커플은 개의치 않고 너무 반갑다며 좋아해주었다. 익숙한 거실. 내 책꽂이에서도 익숙한 제목들이 보이는 그들의 책꽂이. 친구들은 집안 구석구석 내 흔적을 보여주었고, 나는 아직도 내가 그들의 집 곳곳을 차지하고 있음이 영광이라고 답했다. 그 사이 사랑스런 K는 그 작은 손으로 무려 내가 앉을 거실의 식탁의 의자를 빼주었다. (꼬마 신사 K의 매너에 진심으로 감탄하며 내 눈은 하트로 변했다.) 

우린 예전처럼 차/커피, 케잌을 앞에 두고 얘기를 나누었는데, 많은 것이 예전과 같았고, 또 달라지기도 했다. 친구들은 그간 일들을 말하며 눈물을 훔치기도 하고, 때때로 웃기도 했다. 그렇게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나 많은데, 저녁 약속이 있었던 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일어서야 했다. 친구들은 이렇게 헤어지기 너무 아쉽다며, 학회 중간 점심시간에 잠깐 짬을 내어 만나기로 약속했다. 돌아서는 길,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고, 친구들은 내게 따뜻한 옷과 양말을 주고 싶어했다. 

문 앞에서 A는 눈물이 맺혀서는, 네가 떠날 때 우리들에게 네 대체자를 구해주고 갔다면 정말 좋았을거야- 하고 인사를 했다. 진심이 그대로 전해오는 말, 나 역시 이들과 같은 친구들이 가까이 살았다면, 예전처럼 이런 시간이 일상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늘 생각하기 때문에, 아린 마음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 돌아와서, 그들을 위해 
편지를 썼다. 그동안 나누지 못한 책/영화 목록을 쓰자, 편지가 꽤 길어졌다. 그리고 (-간단히 선물하기 좋고, 미국적인-) Edward Hopper와 Andrew Wyeth의 작품이 프린트 된 자석을 편지봉투에 담았다. 가끔 이것을 보고 날 기억해준다면 정말 기쁠테다.

ii. 그렇게 친구들을 만나고 온 지 몇 주가 지났다. 시차 때문에, 바쁜 일정 때문에 정신이 워낙 없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뭔가 몽환적인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들에게도 갑자기 나타나, 또 금방 사라진 내가 환영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비단 이 친구 커플 뿐만 아니라, 만났던 모든 친구들에게서- 우리 모두에게서 예전보다 견고해진 삶의 무게감과 현실적인 고민들이 느껴지기도 했다.

아마 나이를 먹어가며 이러한 무게감은 줄어들지 않겠지만, 아마 그렇겠지만... 그래도 심각하게 고민을 토로하다가도 문득문득 '참, 나 얼마 전 책 박람회에 갔었는데, 거기서 뭘 봤냐면...' '아, 나 그거 신문에서 본 것 같아. 내 신문 스크랩 가져올게.' 라고 말하는, 중동 국가에서 검열 때문에 모니카 벨루치의 장면이 대량 삭제된 007 Spectre를 봤다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또 진지하게 '이번 메르켈의 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라고 묻는 친구들을 보면서- 아마 이들은 앞으로도 인생의 크고 작은 어려움을 현명하게 이겨내고, 또 작지만 아름다운 것들을 늘 감사하며 살 것 같다는 확신이 들어 좋았다. 또 친구들은 몇 번이나 내게 나답게 살라고, 변하지 말라고 말해주었는데- 나도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iii. 이곳에서 찾아 헤매던 Devonshire clotted cream을 발견하고, 곁들일 것을 생각하다 얼그레이 스콘을 구웠다. 받침은 A가 선물로 준 것. 너무 귀여워서 (리본으로 스카프 매어서 준 것도 너무 사랑스럽다!) 장식용으로 두어야겠다고 했더니, 꼭 사용하라고 진지하게 당부해서, 꺼내서 쓰고있다. 잘 쓰고 있다고 A에게 보낼 사진을 찍었다.




iv.
Art is Long, and Time is Fleeting.

문득 Artists in Moomin Valley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화가의 꿈을 안고 정진하려는 무민파파가 "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도다!" 하며 창작의 고통을 호소하자, 가만히 듣고 있던 스너프킨이 "반대가 아닌게 얼마나 다행이에요."하고 대답한다. 그러게, 다행인 것 같다.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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