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don. 순간을 믿어요.


런던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은 24시간 미만. 리버풀 스트리트역에서 오빠 내외를 만났다. 런던은 네 번? 다섯 번?째 방문이었지만 아직도 가고픈 곳이 너무 많았다. 오빠는 미리 내게 어딜 가고 싶냐고 물었고, 난 우선 Highgate Cemetery를 꼽았다. 오빠는 내가 언급한 장소들을 보더니, 이번 방문의 테마는 무덤-시장-책방이군, 이라고 했다. 조용한 아침, 그렇게 하이게이트를 찾았고, Karl Marx 무덤 앞에 섰다. 훔볼트 대학 안에도 써 있는 문구가 그의 묘비에 써 있었다. The philosophers have only interpreted the world in various ways. The point, however, is to change it.

하이게이트 묘지는 내가 그동안 방문한 묘지들과는 좀 달랐다. 무덤들이 꼭 정원처럼 꾸며져 있는 곳이 많아서인지 공원을 산책하는 기분이었고, 조경을 감상하러 온 것 같았다. 아마 모처럼 맑다는 런던의 봄날씨도 큰 몫을 했으리라. 운이 좋게도 내가 런던에 있는 기간은 늘 날씨가 화창했는데(-심지어 비가 온다는 기상 예보도 늘 빗겨났다-), 오빠 내외는 그런 날씨가 평소의 현실 반영 0%라며, '런던하면 당연히 화창함 아니야?'하고 놀리는 나를 두고 못내 억울해 했다.

묘비마다 새겨진 사연들을 읽고, 예쁘게 심어놓은 꽃들과, 무덤 사이로 피어있는 들풀과, 오랜 세월 속 외면되어 잊혀져가는 무덤들을 지나 거닐면서, 새언니(-지만 동갑으로 친구처럼 지내는-)는 내게 왜 일부러 묘지를 방문하는지 물었다. 나는- 글쎄... 내가 존경하는 세상을 떠난 이들의 안식처를 찾아가 인사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아마 큰 이유는 (특히 유럽의 묘지들이 선사하는)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죽음이 실제로 우리 삶과 얼마나 가까운지, 크게 두려워하지 않고 차분히 곱씹어 볼 수 있어서가 아닐까 싶어. 또 떠난 이들을 기억하는 남은 자들의 따뜻한 진심들이 너무나도 잘 느껴지는 곳이기도 하고...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으로 서로에게 남기고 싶은 말들을 읽어보는 것도 흥미롭고...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내가 방문했던 비엔나의, 바르샤바의, 르비브의 묘지들과 그곳에 묻힌 유명인들과 이름없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Hampstead의 부동산 광고는 어찌나 우아한지, 수많은 화가, 철학자, 작가 등을 인용하며 원하는 집과 풍경을 찾아주겠노라고 품위있게 약속하고 있었다.

Camden Market의 하이라이트는 옛마굿간의 용도를 마켓으로 전환하여 사용하는 Horse tunnel market이었다. 옛날에 말이 한 마리씩 들어갔을 공간에 이제는 가게가 하나씩 자리 잡아 사용되는걸 보니 재밌었다. 이렇게 옛 것들이 현대와 이어져 친숙하게 사용되는 것에는 늘 매력을 느끼게 된다. (오빠네 새 집도 옛 공장건물을 전환해 만든 listed building 중 하나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움직임을 통해 옛 것을 그저 기록물로만, 기념물로만 남겨두어 박물관화 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바로 얼마 전 참석한 학회에서는 documentation과 preservation의 중요성을 논하였는데- 모든 것이 그렇듯 적당한 middle ground를 찾는 것은 참 어렵다. 이 분야에서도 학자들과 정책 입안자들과 분야 전문가들과 실무자들의 의견이 제각각이어서 무엇이 옳다, 그르다 얘기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Helene과 Frank의 84 Charing Cross Road. 그곳엔 이미 알고 있던 대로 맥도날드가 자리하고 있었다. 설레는 마음 반, 씁쓸한 마음 반으로 내가 이곳을 찾고 싶어 한 이유를 오빠 내외에게 설명했다. 새언니는 분주한 관광지 내 자리해, 그동안 수없이 앞을 지나갔지만 한 번도 그 존재를 몰랐다며, 앞으로는 벽에 붙은 plaque 하나하나를 관심 있게 봐야겠다고, 내 얘기를 흥미롭게 들어주었다.
 
그리고 Daunt books. 이곳은 인테리어도 아름다웠지만 책 진열과 선별된 책들의 종류가 모두 내 취향이었다. 일주일 여행에 10kg 미만의 짐을 가지고 다니는 나도 순간 욕심이 나서 책을 네 권이나 골랐다. 오빠는 에코백과 함께 책을 사 주었는데, 내가 고른 책들의 제목들(-On the Shortness of Life, On the Suffering of the World....)을 보고 날 조금 걱정하는 것 같았다. (뭘 새삼스럽게.) 

런던의 봄을 품은 듯한 가게.

하루종일 분주하게 돌아다닌 날. (난 이날 새벽부터 약 13마일을 걸었다고 나왔다.) 저녁을 먹고 나오니, 거리의 음악가가 Imagine을 연주하고 있었다. 얼마 전 테러로 많은 희생자가 나온 다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Aha-ah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And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You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as one
Will be as one

Imagine no posses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You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As one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노을을 바라보며 오빠네로 돌아오는 길. 역시 런던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가장 많이 모여있는 도시라는 것이 또다시 상기되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올 때마다 사랑에 빠지게 되는 곳. 또 부질없게 오빠 내외를 마음 가득 부러워하며, 그렇게 다음 방문을 기약해 보았다.

... You decide to stop using the word “anachronism” when a seventeenth-century carriage drives through the gates of Buckingham Palace carrying twentieth-century Russian or African diplomats to be welcomed by a queen. “Anachronism” implies something long dead, and nothing is dead here. History, as they say, is alive and well and living in London . -"The Duchess of Bloomsbury Street", Helene Hanff.



덧글

  • 솔다 2017/04/23 02:32 # 답글

    사진이 정말 멋져요
  • iris 2017/04/23 06:56 #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휴대폰으로 찍은 것들인데- 마주한 저 순간들과 장소들에 대한 제 애정이 사진에 담겨져 나온거면 좋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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