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가져다 준 기억. rambling.


i. 첫 눈이 처연하게 내리는 창밖을 보면서 글을 쓰고 있다. 커피도 맛있고, 음악도 좋고- 행복하다. 아직 스스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잘 알고 있어 다행이다.

ii. 어제는 M에게서 소포가 왔다. 정성스레 직접 만든 크리스마스 카드, 봉투를 한참동안 바라만 보다 정말정말 조심스럽게 뜯어보았다. M을 처음 만난 해부터 지금까지, M은 내가 어디있든 늘 이렇게 손수 만든 카드를 보내주고 있다.

상대방을 위해 직접 무언가를 만들어 본 사람들은- 그 정성과 마음을 잘 알고 있을테다. 현대 사회에서 많은 이들은 직접 만든 (그래서 어쩌면 조금 서툴거나 원형적으로 '완벽'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무언가보다, 세련되고 더 보기 좋은 것을 찾고 있지만, 난 아직도 그게 잘 안 된다. 나를 생각하며 만든 시간과 마음을 헤아려보면, 이것보다 더 값진 것들을 생각해 낼 수 없다.

작년 말에는 정말 정신적, 육체적으로 여유가 없어 제대로 연말연시 인사를 하지 못했다. 그나마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는 마들렌을 조금 구워서 나누었지만, 먼 곳에 있는 이들에게는 먼저 따뜻한 인사 한 마디조차 건네지 못해서 마음이 못내 무거웠다. 그에 전혀 개의치않고, 한결같이 전해오는 마음들은 내 마음을 녹인다. 그래도 괜찮다고, 우린 아직 여기 있다고.


iii. M은 카드와 함께 즐겨듣는 재즈 피아니스트 음반을 보내왔다. 아침을 차리며, 또 아침을 먹으며 음반을 들었다. '완전 취향저격이네.' 하면서. 안 그래도 최근 가보고 싶은 재즈 카페를 몇 군데 찾았지만, 누구와 가야할지 선뜻 떠오르지 않아서 못내 아쉬웠었는데... 더 가까이 살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은 이들을 한 명씩 마음 속으로 그려본다.


iv. 음악을 들으며 친구 얘기를 하고, 또 음악이 가져다 준 기억들을 아빠와 나누었다.
내가 음악을 들으며 떠올린 풍경은 11월 초의 Gdansk 풍경이었는데, 추억을 하나씩 꺼내어 풀어놓다가 그리움에 자꾸 눈물이 나올 것 같아 혼났다.


떠오른 첫번째 기억. 대학원 입학 후 3주가 채 지나지 않아 Gdansk에 처음 갔을 때, 나는 흔히 떠올릴 수 있는 B사감의 이미지와 똑닮은 학과장님 앞에서 그 도시의 '중요한 것'에 대해 발표를 해야 했었다. 

다소 추상적인 주제 앞에서, 나는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조사해서 발표했는데, 안타깝게도 그건 학과장님의 기대에서 완전히 어긋난 것이었다. 학과장님이 염두에 두고 계셨던 것은 solidarnosc와 레흐 바웬사의 이야기였는데, 나는 (지금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그곳의 예술 박물관에 대해 발표했던 것이다. 학과장님은 다소 화가 나셔서, '어긋난' 주제에 모두들 앞에서 나를 크게 책망하셨고, 나는 애초부터 모호했던 발표주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내가 고른 주제를 defend 하고 싶었지만, 나는 정작 그 냉랭한 분위기와 '너는 틀렸어'라는 태도 앞에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마침 바르샤바 법대 출신인 (또다른) M이 나를 구제하려고 나서서 Gdansk의 근현대 역사와 바웬사의 생애를 설명해 줌으로써 이 해프닝은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이 일은 내 삶에 있어 정말 큰 영향을 미쳤는데, (물론 당시 학과장님의 '답정너' 태도는 결코 본받을만한 것이 아니었지만) 나는 그때 '상식'과 '가치'의 다수의 차원들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때까지 내가 (알게 모르게) 지니고 있던 일종의 지적 자만심을 내려놓게 되었던 것 같다. 그동안 내가 몸 담았던 곳에서 나름의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만큼의 인정과 칭찬을 받았던 가치나 태도, 혹은 지식 따위가 다른 곳에서는 통용되지 않거나, 타인에게 전혀 다른 잣대로 재단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언제라도 틀릴 수 있다는 것. 내가 알았던 세상은 사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것. 이건 꽤 아프고 부끄러운 경험이었지만, 어린 날의 내게 꼭 필요한 인생의 가르침이었고, 난 그러한 이유로 학과장님께 아직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 그리고 친구들 몇 명과 찾아간 charity concert와 쇼팽. 새벽에 일어나 혼자 걸었던 안개 속 Gdansk. 그 몽환적인 시간들. 돌아와 Y가 우연히 찍었다며 보내준 Gdansk 밤안개와 흐리게 번진 불빛 속의 내 사진 등등.


... 음악을 배경으로 그러한 이야기들을 하나씩 한참동안 늘어놓다가, 그때의 내가, 또 그때 함께 했던 이들이 못내 그리워져 자꾸 목이 메었다. 또 Gdansk의 쇼펜하우어 생가에서 Kaliningrad의 칸트로, Gdansk의 바웬사에서 프라하의 하벨로 넘어가 아빠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이 아침의 시간도 무척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친구의 음악선물이 만들어 준 새로운 아름다운 추억이다.




(찾아보니 Leszek Możdżer도 Gdansk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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