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 - 쓰시마 유코.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 하지만 말로써 그런 내 마음을 확인해서는 안 된다. 침묵이 필요하다. 침묵을 지키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 없이 언제든지 거래를 재개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 그런 거래를 묵시라 부른다고 한다.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묵시가 조금도 신기한 일이 아니란 것을 나도 이제 이해하기 시작했다. ... 숲에 많은 것을 버렸지만 버린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 놓아준 것이라 생각하고, 자기가 알지 못하는 숲의 모습을 마음대로 상상하고, 집착하고, 그리워한다. ... 어떤 형태로든 묵시가 숲 안쪽과 바깥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 돌아간다,는 말을 순순히 쓸 수가 없었다. 언제나 돌아간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그 말을 노려보았다.

... 지면을 덮은 채 조용히, 그렇지만 아낌없이 풍요롭게 흩날리는 노란 잎들이 모든 죽은 이의 숨결을 상징한다면, 노란 잎들의 흐름에 제 몸을 맡기듯 종려나무 빗자루로 묵묵히 그것들을 쓸어모으던 D선생님은, 분명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자에게 가능한 가장 자연스러운 기도를 하고 있던 것일 테다.

... 우리는 그 시간에 기대 지리멸렬하게, 생각나는 대로 마구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는 네 이야기가 듣고 싶었고, 너는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다. 어째서 우리는 그렇게도 열심히 서로의 이야기를 들었을까. ... 언젠가 어디선가 너와 그 시간을 그리워하며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웃으면서. 아니면 곤혹스러워하면서. 슬픔에 싸여서. 영어로. 아니면 불어로. 그도 아니면 일본어로. ...나는 지금 일본어로, 너와 함께했던 그 시간들을 더듬는 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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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의 딸, 이란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읽어 나간 그녀의 책. 
너무 일차적인 해석과 느낌이겠지만, 아버지의 자살과 지적 장애가 있는 오빠를 먼저 떠나보냈던, 또 어린 아들을 잃었던 그녀의 많고 깊은 아픔들이 이야기 전체에 아주 진하게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슬픔을 느끼는 것일는지-, 또 그걸 무력하게나마 글로 풀어내야만 하는 그녀의 버거운 운명에 대한 바둥거림이 애처롭고 씁쓸하게 느껴졌고, 읽어나가기가 참 힘들었다. (어떤 면에서 요시모토 바나나와 조금 비슷한 것 같지만, 몇 십배는 더 무거웠던.)


부고에서는 -는 (be) survived by (가족 일원)라는 표현이 쓰이곤 하는데, 유전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글로나- 그녀로 인해 이 세상에 아직 남겨진 이들이 많았던 것 같다. (안타깝게도 그녀도 폐암으로 투병을 하다 올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제 부디 조금은 편안해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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