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끓이며 - 김훈.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 슬픔도 시간 속에서 풍화되는 것이어서, 40년이 지난 무덤가에서는 사별과 부재의 슬픔이 슬프지 않고, 슬픔조차도 시간 속에서 바래지는 또다른 슬픔이 진실로 슬펐고, 먼 슬픔이 다가와 가까운 슬픔의 자리를 차지했던 것인데, 이 풍화의 슬픔은 본래 그러한 것이어서 울 수 있는 슬픔이 아니다.
우리 남매들이 더이상 울지 않은 세월에도, 새로 들어온 무덤에서는 사람들이 울었다. 이제는 울지 않는 자들과 새로 울기 시작한 자들 사이에서 봄마다 풀들은 푸르게 빛났다.

... 울진바다에서는 나는 바다의 불가해한 낯설음에 압도되어서 늘 지쳐 있었다. 수평선 너머로부터, 내가 기다리는 새로운 언어는 날아오지 않았고, 내가 바다 쪽을 바라보는 시간은 날마다 길어졌다. 나는 조금씩 일했고 많이 헤매었다.

... 이 섬을 드나드는 빛은 비스듬하다. 아침의 빛은 멀리서 오고 저녁의 빛은 느리게 물러가서 하루의 시간은 헐겁고 느슨하다. 이 섬의 빛은 어둠과 대척을 이루지 않는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지 않고 어둠이 빛을 걷어가지 않는다. 빛과 어둠은 지속되는 시간의 가루들을 서로 삼투시켜가면서 교차되는데, 그 흐름 속에 시간과 공간은 풀어져서 섞여 있다. 어둠에 포개지는 빛이 비스듬히 기울 때 풍경은 멀고 깊은 안쪽을 드러낸다. 빛은 공간에 가득 차지만 공간을 차지하지 않고 빈 것을 빈 것으로 채워가면서 명멸한다. 만조의 바다 위에 내리는 빛은 먼 수평선 쪽이 더 찬란하다. 그 먼 빛들의 나라로 들어가면 그 나라의 빛은 더 먼 나라에서 빛나고 있을 터이다. 그래서 빛의 나라는 무진 강산이다. 밀물은 마을 앞 방조제 턱밑까지 바싹 달려들고 썰물의 갯벌은 수평선에 포개진다. 빛은 물 위에 내려앉지만 물을 디디지는 않는다. 밀물 때 먼 나라의 빛들은 물에 실려서 섬으로 들어오고, 물이 빠지면 붉은 석양의 조각들이 갯벌 위에 떨어져서 퍼덕거린다. 이 섬에서는 빛이 공간 속을 드나드는 모습과 바닷물이 시간 속을 드나드는 모습이 닮아 있다. 이 흐름 속에서 시간과 공간, 어둠과 밝음, 채움과 비움처럼, 인간이 세계의 골격으로 설정해 놓은 개념들은 스스로 소멸한다. 개념들이 소멸할 때 그 개념에 해당하는 실체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거나 아직 확보되지 않았다는 것을 겨우 알게 되는데, 이러한 저녁의 자유는 난감하다.

... 어선의 헝클어진 모습은 가지런한 무질서이며 시원적 삶의 경건성이다. 어선은 작업의 내용을 형식으로 얽어매지 않고 무질서한 외양으로 흩어놓는다. 그 노동의 표정은 허술하고도 단단하다. 삶의 하중이 중첩된 그 표정이 오히려 느슨해 보이는 까닭은 새롭게 다가오는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서 지나간 시간의 무게를 비우기 때문일 것인데, 그때 비워지는 무게는 하중이 아니라 표정으로 드러난다.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드러내 보이는 그 표정은 생애화된 노동의 풍경이다.

... 개별적으로 창조된 생명이란 없다고, 내가 젊어서 읽은 과학책에 쓰여 있었는데, 진화는 개별적 생명의 온전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독자성의 전개과정이었을 것이다. 생명이 멸종되고 살아남는 전개과정의 한 단계라고 해서 그 작은 물고기의 개별적 독자성이 훼손되지는 않을 것이다.

... 자연은 인간에게 적대적이거나 우호적이지 않지만 인간은 우호적이지 않은 자연을 적대적으로 느낀다. '무위'는 자연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손댈 수 없는 인간의 무력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열대의 밀림은 가르쳐주었다.

... 생명을 서로 긍정하는,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서의 평화는 불가능할 것인지를 나는 강가에서 생각했다.

... 그때 나는, 이 진부한 삶의 끝없는 순환에 안도하였다. ... 진부하게, 꾸역꾸역 이어지는 이 삶의 일상성은 얼마나 경건한 것인가. 그 진부한 일상성 속에 자지러지는 행복이나 기쁨이 없다 하더라도, 이 거듭되는 순환과 반복은 얼마나 진지한 것인가.

... 시간 속에서는 덧없는 것들만이 영원하다. 모든 강고한 것들은 무너지지만, 저녁노을이나 아침이슬은 사라지지 않는다.

.... 나는 모든 죽음에 개별적 고통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에 값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생명과 죽음은 추상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회복이 불가능하고 대체가 불가능한 일회적 존재의 영원한 소멸이다. ... 그래서 한 개인의 횡사는 세계 전체의 무너짐과 맞먹는 것이고, 더구나 그 죽음이 국가의 폭력이나 국가의 의무 불이행으로 비롯된 것이라면 이 세계는 견딜 수 없는 곳이 되고 말 것인데, 이 개별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체제가 전체주의다. 이 개별적 고통에 대한 공감이 없다면 어떤 아름다운 말도 위안이 되지 못하고 경제로 겁을 주어도 탈상은 되지 않는다.

... 너의 의무는 몇몇 비굴한 이탈자들에 의하여 신성이 모독되었지만, 송두리째 부정당한 것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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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깊고 묵직한 시선과 글.

읽는 동안 귀한 생각과 삶의 무게감을 지닌 지혜를 (감히) 선물받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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