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 한강.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 아니요.
그녀는 테이블에 놓인 백지에 적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 세상은 환幻이고, 산다는 것은 꿈꾸는 것입니다, 라고 보르헤스가 구술한 문장 바로 아래였다.

... 그렇게 무사히 이곳의 하루하루가 흘러갑니다. 간혹 기억할 만한 일이 있었다 해도, 거대하고 불투명한 시간의 양감에 묻혀 흔적 없이 지워집니다... 그러니까, 어떤 감상과 낙관에도 빠지지 않은 채 나는 여기 있는 것입니다.

... 당신이 그토록 싫어했던 희랍식 논증의 방식으로 이따금 나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무엇인가를 잃으면 다른 무엇인가를 얻게 된다는 명제가 참이라고 가정할 때, 당신을 잃음으로써 내가 무엇을 얻었는지. 보이는 세계를 이제 잃음으로써 무엇을 얻게 될 것인지.

인간의 모든 고통과 후회, 집착과 슬픔과 나약함 들을 참과 거짓의 성근 그물코 사이로 빠져나가게 한 뒤 사금 한줌 같은 명제를 건져올리는 논증의 과정에는 늘 위태하고 석연찮은 데가 있기 마련입니다. 대담하게 오류들을 내던지며 한 발 한 발 좁다란 평균대 위를 나아가는 동안, 스스로 묻고 답한 명철한 문장들의 그물 사이로 시퍼런 물 같은 침묵이 일렁이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계속 묻고 답합니다. 두 눈은 침묵 속에, 시시각각 물처럼 차오르는 시퍼런 정적 속에 담가둔 채.

... 고백하자면, 학생들을 지켜보다보면 문득 부러워질 때가 있어. 우리처럼 인생과 언어와 문화가 두동강 나본 적 없는 사람들만 가질 수 있는 어떤 확고함 같은 것이.

... 너에게는 그가 말해주었니. ... 어떤 도시의 어스름 속에서 나처럼 기다리다 돌아왔는지. ...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 이 어스름이 정말 완전한 밤으로 이어지는지.

... 이 세계는 덧없고 아름답지요, 라고 그가 말한다.
하지만 이 덧없고 아름다운 세계가 아니라, 영원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원했던 거지요, 플라톤은.

...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오히려 모든 꿈에서 깨어난 상태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현실 속의 아름다운 사물들을 믿는 대신 아름다움 자체만- 현실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절대적인 아름다움만을- 믿는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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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쓸쓸하고도 따뜻한 소설이었다.
빛을 잃어가는 남자와 말을 잃어가는 여자.

꿈에도 나타나지 않는 아름다운 세계가, 어쩌면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현실에서- reaching out과 연결성, 또 침묵과 인간적인 배려를 통해 구현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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