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중순. rambling.


i. 요즘은 1박2일을 다시보기로 열심히 챙겨보고 있다. 여태까지 1박2일은 본 적이 없는데, 우연히 얼마 전 하얼빈 편을 보고 난 후부터 챙겨보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꾸준히 보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배경음악으로 자주 나와서였는데, 그러다 유호진 PD에게 관심이 생겼다. (물론 배경음악 모두를 그가 다 선곡한 것은 아니겠지만.) 알고보니 그는 내가 자주 듣던 'gloomy cafe'의 원년 멤버였다.

그러다 접한 그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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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애를 시작하면 한 여자의 취향과 지식, 그리고 많은 것이 함께 온다.
그녀가 좋아하는 식당과 먹어본 적 없는 이국적인 요리. 처음듣는 유럽의 어느 여가수나 선댄스의 영화. 그런걸 나는 알게된다. 그녀는 달리기 거리를 재 주는 새로 나온 앱이나 히키코모리 고교생에 관한 만화책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녀는 화분을 기를지도 모르고, 간단한 요리를 뚝딱 만들어 먹는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주 많은 나라를 여행해 보았거나 혹은 그녀의 아버지 때문에 의외로 송어를 낚는 법을 알고 있을수도 있다. 대학때 롯데리아에서 잠시 아르바이트를 했었던 까닭에 프렌치후라이를 어떻게 튀기는지 알고 있을수도 있다.

그녀는 가족이 있다. 그녀의 직장에, 학교에는 내가 모르는 동료와 친구들이 있다. 나라면 만날 수 없었을, 혹은 애초 서로 관심이 없었을 사람들. 나는 그들의 근황과 인상, 이상한 점을 건너서 전해듣거나, 이따금은 어색하나마 유쾌한 식사자리에서 만나게 되기도 한다. 나는 또 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엿보게 된다.

그녀는 아픈 데가 있을수도 있다. 재정적으로 문제가 있을수도 있다. 특정한 부분에 콤플렉스가 있을수도 있다.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부모님과 갈등을 겪고 있을수도 있다. 그건 내가 잘 모르는 형태의 고통이다. 그러나 그건 분명 심각한 방식으로 사람을 위협한다.

그녀의 믿음 속에서 삶이란 그냥 잠시 지속되었다가 사라지는 반딧불의 빛 같은 것일 수도, 혹은 신의 시험이자 선물일 수도 있다. 혹은 그런 고민을 할 여유가 없는것이 삶 자체라고, 그녀는 피로에 지쳐 있을 수도 있다.

요컨대 한 여자는 한 남자에게 세상의 새로운 절반을 가져온다. 한 사람의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편협하기 때문에 세상의 아주 일부분 밖에는 볼수 없다. 인간은 두 가지 종교적 신념을 동시에 믿거나, 일곱 가지 장르의 음악에 동시에 매혹될 수 없는 것이다.

친구와 동료도 세상의 다른 조각들을 건네주지만, 연인과 배우자가 가져오는건 온전한 세계의 반쪽. 에 가깝다. 그건 너무 커다랗고 완결되어 있어서 완전하게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녀가 가져오는 세상 때문에 나는 조금 더 다양하고 조금 덜 편협한 인간이 된다.

실연은 그래서 그 세상 하나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연인이 사라진 마음의 풍경은 그래서 을씨년스럽지만 그래도 그 밀물이 남기고 거대한 빈공간에는 조개껍질 같은 흔적들이 남는다. 나는 혼자 그 식당을 다시 찾아가보기도 하고, 선댄스의 감독이 마침내 헐리웃에서 장편을 발표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기도 한다. 그런 것을 이따금 발견하고 주워 들여다보는 것은 다분히 실없지만, 아름다운 짓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그러한 실연이 없는 관계- 결혼 생활이 시작된다면 그 모든 절반의 세계는 점차 단단히 나의 세계로 스며들기 시작할 것이다. 그건 굉장히 이상하고 기묘한 일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 세계의 리스트에는 그녀가 가져온 좋은것과 문제점 모두가 포함된다. 그건 혜택과 책임으로 복잡하게 얽힌 대차대조표라서 어차피 득실을 따지기가 어렵다.

세월이 감에 따라 그녀가 최초에 나에게 가져왔던 섬세한 풍경들의 윤곽, 디테일한 소품들은 생활이라는 것에 차차 -혹독히- 침식되겠지만, 그 기본적인 구성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여전히 나와 몹시 다르고, 다양해서- 이따금 경이로울 것이다.

한 사람이 오는건 그 사람의 삶 전체가 오는 것,이라는 말을 웬 광고판에서 본 적이 있다. 왜 아침에 그 문구가 생각났을까. 아무튼 사람을, 연인을 곁에 두기로 하는 것은 그래서, 무척이나 거대한 결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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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으며 왜 처음부터 유호진 PD가 마음에 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좋은 목소리와 더불어서.)


ii. 한 사람이 오는건 그 사람의 삶 전체가 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문득 결혼을 몇 주 앞둔 소중한 18년 지기 친구 K의 모바일 청첩장 문구가 떠올랐다.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사람이 아니라 나와 삶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참 곱고 마음을 울리는 문구였다.

있는 그대로의 나의 삶을 온전하게 다 가져가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하는 것,이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 사실 나는 아직 가늠하기 어렵다. 그리고 조심스레, 편협한 내게 새로운 세상을 가져다 준 이들을 떠올려 본다. 난 여전히 그 조개껍질들을 하나씩 주우면서 또다른 세상을 배워 나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어쩌면- 변변치 못한 내 세상이나마 선물하고 싶은 순간을, 또 내가 머물고 싶은 세상을, 우연히 마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iii. (아직 맨유의 경기가 남아있긴 하지만-) 마지막 경기까지 흥미진진한, 여러모로 극적인 EPL 시즌이 마무리 되었다
.
 
무엇보다 이번 시즌을 끝으로 로시츠키와 헤어짐은 무척 마음이 아프다. 그가 떠나면 내가 '아스날'하면 떠올렸던 이미지나 인물에 부합하는 사람이 이제는 교수님 뿐이구나, 싶었다.


Super Tom.


덧글

  • anchor 2016/05/24 10:25 # 답글

    안녕하세요, 이글루스입니다.

    회원님께서 소중하게 작성해주신 이 게시글이 5월 24일 줌(zum.com) 메인의 [여자들의 수다] 영역에 게재 되었습니다.

    줌 메인 게재를 축하드리며, 5월 24일 줌에 게재된 회원님의 게시글을 확인해 보세요.

    그럼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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