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 John Berger.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 인생이라는 건 본질적으로 선을 긋는 문제이고, 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지는 각자가 정해야 해. 다른 사람의 선을 대신 그어 줄 수는 없어. 물론 시도는 해 볼 수 있지만, 그래 봐야 소용없는 일이야. 다른 사람이 정해 놓은 규칙을 지키는 것과 삶을 존중하는 건 같지 않아. 그리고 삶을 존중하려면 선을 그어야 해.

... 이젠 너무 늦었어! 이건 어머니가 자주 쓰던 말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말만 들으면 화가 치솟았다. 그 말을 하게끔 만든 사소하거나 중대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 그 말은 어떤 사건이 아니라 시간이 접히는 방식- 즉 구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가르는 그 시간의 주름에 대해 얘기하는 것처럼 들렸다.

... 사람들은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위험을 통제하려 들지. 그러니까 전에 통제됐었던 위험들을 말이야. 나는 처음부터 너를 그냥 혼자 놔뒀어.
- 혼자라서 외로웠어요.
... 그건 정말 의외로구나, 얘야. 너는 자유로웠어.
- 모든게 겁이 났어요. 지금도 그래요.
... 당연하지. 어떻게 안 그럴 수 있겠니? 두려움이 없거나 자유롭거나 둘 중의 하나지, 둘 다일 수는 없어.
- 둘 다일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은 확실히 모든 철학의 목표겠죠, 어머니.
...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건 철학이 아니야.
... 사랑은 그럴 수 있지, 잠깐 동안.

... 요즘은 헛소리를 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아요.
- 뭘 쓰더라도 그게 뭔지를 당장에 아는 건 아니야. 늘 그랬어. .. 다만 네가 거짓말을 하는지, 아니면 진실을 말하려고 노력하는지, 그것만큼은 알아야 해. 더 이상은 그걸 혼동하는 실수를 용납할 여지가 없으니까.

... 번번이 길을 잃어요.
- 너의 시선이 또렷한 건 그 때문이야.

... 너희와 우리, 우리는 망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고치기 위해 여기 있는 거란다.

... 상황이라고! 그 말 뒤에는 뭐든 숨을 수 있어. 말했듯이 나는 고치는 것의 힘을 믿고, 또 한가지를 믿어. ... 욕망의 필연성. 욕망은 중단될 수 없어.

... 그답기 그지없는 이런 얘기를 들으니 그에 대한 애정이 되살아난다. 그의 여행, 늘 만족시키려 노력했으며 결코 억누르지 않았던 그의 취향, 그의 고단함과 슬픈 호기심을 사랑했던 나의 마음이. ... 환상이 결여된 그의 시각도 사랑했었다. 그는 환상을 품지 않았기 때문에 환멸도 겪지 않았다. ... 그는 우리가 함께라면 세상의 어느 도시에서도 음악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고 믿게 만들었던 사람이다.

... 쇼베 동굴에 그려진 대부분의 동물들은 맹수지만, 그림에는 두려움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존경심. 그렇다. 우정 어린, 친밀한 존경심. 그리고 그것은 여기 그려진 모든 동물의 이미지 속에서 인간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즐거이 드러난 존재. 이곳의 모든 동물들은 인간 안에서 안온하다.

... 유목민에게 과거와 미래라는 개념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의 경험에 종속된다. 지나가 버린 것, 또는 기다리는 것은 어딘가 다른 곳에 숨겨져 있다.

... 이 선의 이런 검은색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어둠을 다시금 확신시켜 주는 검음, 태고의 속을 채우려 드는 검음.

... 이 동굴 벽화들은 어둠 속에 존재하도록 바로 그곳에 그려졌는지 모른다. 이것들은 어둠을 위한 그림이었다. 이것들은 보이는 모든 것보다 오래 살아남았고, 어쩌면 생존을 약속하도록 어둠 속에 숨겨져 있었다.

... 우리를 한데 묶어 준 건 뭐였을까? ... 우리를 한데 묶어 준 건 같은 슬픔에 대한 말 없는 이해였다. ... 우리 두 사람의 스타일은 놀랍도록 비슷했다. 복장이나 브랜드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 하지만 우리가 서로의 눈을 깊이 들여다봤을 때, 거기에 깃든 위험을 더없이 잘 알고 있으면서도 서로의 눈을 그렇게 응시했을 때, 우리는 둘 다 빌려 온 시간은 괴물 같은 망상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이게 슬픔이었다.

... 우리가 끊임없이 역사의 통속성을 지워 버리던 날들이 있었잖아, 기억해? 그녀가 말한다. 그러다가도 얼마쯤 지나면 당신은 나를 저버린 채 돌아가곤 했지. 돌아가고, 또 돌아갔어. 당신은 중독이었어.

... 약속이 없으면 누구에게나 삶은 너무 힘들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믿지도 않는 약속을 한다면 그건 약속이 아니야!

... 그가 쫓는 순수함의 조각들은 늘 존재했지만, 그의 노력을 힘들게 만드는 것은 몸을 드러낸 순수함이 번번이 다시 숨어버린다는 사실이다.

... 음악은 순수함을 모색하고 있다. 음악이 찾는 것은 욕망의 순수함, 갈망과 약속의 중간에 놓인 어떤 것이었다. 삶의 가혹함을 견뎌낼 수 있다는- 또는 어떤 식으로는 이겨낼 수 있다는 - 위안의 약속.

... 내 생각엔 우리가 모르스키에 오코 호수에 갔던 건 시간이 우리 없이 이룬 것들을 보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 어디나 아픔은 있다. 그리고 어디나, 아픔보다 더 끈질기고 예리한, 소망이 담긴 기다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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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리스본에서 어머니를, 제네바에서 보르헤스를, 크라쿠프에서 삶의 안내자를, 아일링턴에서 대학시절의 인연들을, 그리고 다른 곳에서 또다른 누군가를....이렇게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세상을 떠난 많은 이들과 만나고 대화를 나눈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망자들의 말에 귀기울이고, 잊혀진 이들과 이야기들을 건져내고, 소소한 삶의 중요성을 하나씩 다시 짚어준다.

떠난 이와 지난 것들에 대한 주인공의 진심어린 애정과 따뜻함이 느껴졌고, 그의 글에 기대어 나도 많은 것들을 추억했다. 산타주스타 엘리베이터에서, 아일링턴에서, 크라쿠프에서, 제네바로 가기 전 국경에서- 주인공과 같은 장소에서 같은 기억을, 때로는 다른 장소에서 같은 기억을 떠올리며, 그 모든걸 단순히 우연, 이라 치부하기에는, 우리네- 개개인의 삶이 서로 얼마나 닮아있는지 생각했다.

또- 이렇게 마음껏 그리워하고, 추억하고, 반추할 수 있음은 그 모든 것이 '이미 지나가버린 것'이기 때문일까 생각했다. 소중히 보듬을 수 있도록, '과거'가 되어야만 하는 그 모든 것들과, 그 안타까운 아이러니는...


그리고- 이 노래가 떠올랐다. 어쩐지 비틀즈 원곡이 아닌 이 버전이 듣고 싶었다. 이처럼 그 모든 것들이 따스하길...






... There are places I remember 
All my life, though some have changed
Some forever not for better
Some have gone and some remain
All these places have their meaning (moments)
With lovers and friends I still can recall
Some are dead and some are living
In my life I've loved them all...


덧글

  • maga 2016/04/02 00:49 # 답글

    좋네요
  • iris 2016/04/03 04:21 #

    네. 좋아하는 작가와 음악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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