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 Ivan Illich.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1. 위기인가 선택인가

... 가격표가 붙지 않는 거래는 모조리 무시하는 산업사회는 인간이 적응할 수 없는 도시의 풍경을 만들었다. ... 이곳에서는 날마다 쏟아지는 물건과 명령이 내가 원치 않는 결과를 만들고, 그때마다 나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들수록 차별과 무기력, 절망의 골이 더 깊어지는 세계이다.

... 요즘에는 말이 점점 비슷하게 들린다. 세계 어디서나 인간의 의식이 수입 상표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럼에도 문화와 유전자 다양성이 사라지고, 동위원소가 끼치는 장기적인 결과를 우려하는 사람조차 나라마다 고유한 공예와 전설, 인간이 돌이킬 수 없이 사라지는 것에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 문화란 인간이 행위를 하기 위한 규범이지 기업이 물건을 생산하기 위한 규범이 아니다. 하지만 산업사회에서는 민간기업이든 국영기업이든 가격으로 측정되는 생산물로 문화의 중심을 오염시키고, 인간이 스스로 행동하고 만드는 능력을 감퇴시킨다. 결과적으로 이 사회는 거대한 제로섬 게임으로 바뀌었다. 이 단일한 상품 운송체계에서는 한쪽에서 무언가를 얻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한쪽에서는 무언가를 잃고 부담을 짊어지는 사람이 생겨난다. 하지만 양쪽 모두 진정한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풍요에 사람들이 중독되고 그것이 문화 속으로 한번 배어들면 '가난의 현대화'가 생겨난다. 현대화된 가난은 상품이 확산하면서 어김없이 발생하는 부정가치의 형태이다.

...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절제는 대중이 자신과 이웃의 만족을 위해서, 권력이 생산하는 상품의 최대 생산량을 파악하고 제한하는 사회적 차원의 미덕을 의미한다. 이러한 공생의 절제는 한사회로 하여금 인간을 무력화하는 풍요로부터 개인의 사용가치를 보호하도록 영감을 불어넣는다. 그러한 사회적 보호하에서라면 비로소 현대적 도구 사용의 확산을 강조하는, 특색 있는 문화들이 다양하게 싹틀 수 있을 것이다. 함께하는 절제는 어떤 도구든 과다한 사용을 절제하기 때문에 도구의 소유자라 해도 권력을 함부로 쓸 수 없게 된다.


2. 전문가의 제국 

... 과학자든 치료사든 행정가든 전문가가 대중으로부터 받는 신뢰가 산업 시스템의 아킬레스건이다.

... 그러므로 인간을 불구로 만드는 전문가가 교묘하게 지배하는 상황에 정면으로 맞서는 시민 주도의 급진 기술만이, 위계질서가 아니라 공동체를 기반으로 살아갈 능력을 발휘하는 자유의 길을 열어젖힐 것이다. 현재의 전문성이 소멸할 때 인간의 필요와 도구, 만족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출현할 수 있다. 그 첫걸음은 직업적 전문가에게 보내던 존경을 버리고 의심을 던지는 것이다. 시민들 사이에서 회의가 싹트기 시작할 때 사회의 재건도 시작된다.

... 전문가가 지휘하는 사업을 따라가다 보면 정치신념을 강요받게 되고(새로운 형태의 파시즘과 함께), 경험 많은 시민들은 우리의 지나친 자신감을 보고 현대의 프로메테우스가 가져다준 또 하나의 어리석은 역사적 수집물에 불과하다고 깎아내린다. 이 시대에 현명한 선택을 내리기 위해서는 누가, 누구로부터, 무엇을, 왜 갖는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전문가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 인간의 필요를 전문가가 구상하여 만드는 이 시대는 저주로 기억될 것인가? 아니면 미소로 기억될 것인가?

... 신종 전문가들이 속속 '치료/보살핌'을 제공하는 호황 산업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자기 분야에서 치료받을 고객을 확보하고 처방 기구를 만드는 광범위한 자율권을 누리고 있다. ... 많은 전문가들이 기반을 확고히 다지고 나자, 이제는 고객이 된 개인을 감독할 뿐 아니라 병실이 되어버린 그의 세계를 어떤 형태로 만들지 결정한다. 그리하여 인간이 자아를 인식하고, 자유와 권리를 분별하고, 필요를 깨닫게 하는 언어는 모두 전문가의 권력에서 갈라져 나오게 되었다. ... 이런 문화에서 소비자는 스스로 배우기보다 만들어진 필요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

... 상식의 근간이 되는 말이 전문가가 통제하는 전문용어로 오염되었다. 말이 그렇게 침탈되어 일상 언어는 고갈되고 전문용어로 변질되는 사이, 사회는 좀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변질되어 급여를 받고 고용되지 않으면 그 사람의 가치가 박탈되는 특수한 형태의 환경이 만들어졌다. 계획과 태도, 법률에서 전문가 지배를 약화시킬 변화를 일구려면 그들의 지배를 숨기는 잘못된 이름들에 더욱 민감해져야 한다.


3. 산업사회의 환상

... 후기 산업사회가 인간을 불구로 만드는 거대한 서비스 전달체제로 합쳐지고 있는데도, 왜 저항은 일어나지 않는가? 그 이유는 이 체제가 환상을 만들어내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이 운영하는 제도는 인간의 몸과 마음에 기술적 영향을 끼치는 것 외에도 마치 강력한 의례처럼 제도의 관리자들이 약속하는 것에 믿음을 갖게 만든다.

...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개인이 생산하는 가치와 표준적으로 생산되는 가치가 혼동되고 있다. 전문가의 지휘 아래 사용가치가 해체되고 쓸모없어지다가 마침내 그 고유한 본성마저 없어지고 말았다.

... 단순히 채우는 필요가 아니라 만족감을 주는 필요는 한 사람이 스스로 행동하고 그 과정을 회상하면서 생겨나는 즐거움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

... 새로운 전문가 중에서도 가장 영민한 사람들은 희소성이 커질수록 필요에 대하여 더욱 고도의 통제를 할 수 있다는 걸 명확히 파악한다. ... 그러나 아직도 인식되지 않는 점은, 전문가가 선포하는 한계를 통해 구원될 수 있다는 이 새로운 환상이 자유와 권리를 혼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 이 환상의 정확한 본질은 사회적으로 권리 추구를 지원하면 자동으로 자유가 보장된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실제로 전문가가 권리를 정의할 권한을 갖게 되면서 시민의 자유는 사라져버렸다.


4. 쓸모 있는 실업을 할 권리

...직장 밖에서 일하거나 전문가의 지시 없이 의미 있는 일을 할 자유는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 이런 문제를 지칭할 이름은 아직 생기지 않았지만, 이 역시 가난의 현대화로 겪게 되는 가장 분노스러운 경험일 것이다. 아마도 지금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은 직장에 다니지 않고도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일 것이다.

... 우리 사회의 대안은 평범한 사람들이 전문가가 끼워 넣는 필요에 부딪힐 때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부정하는 능력에 달려있다.


5. 적들의 반격


6.현대의 자급

... 후기 산업사회에 확립될 삶의 양식을 현대의 자급이라 부르기로 하자. 이 사회에서는 정치적 수단을 통해 전문적 필요 생산자들에 의해 측정되지도 않고, 그들이 측정할 수도 없는 사용가치를 만드는 데 도구와 기술이 주로 쓰이도록 사회 기반시설을 보호한다. 그리하여 시장 의존을 줄이는 데 성공한 사회이다. ... 나는 정치적 행동으로 일구어낸 '함께하는 절제'로 그런 기술(/공생을 위한 도구)을 공평하고 자유롭게 사용할 때, 현대화된 가난을 뒤집을 수 있다고 말했다.


---------------

산업 시스템에 대한 신랄한 비판, 오랜만에 정말 속 시원한 글을 읽었다. very enlightening.

내가 하고 싶은/할 수 있는 '일'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