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eet & sour. rambling.



i. 얼마 전에 D를 보러 루마니아에 놀러간 꿈을 꾸어서, D에게 연락을 했다. (루마니아는 가본 적이 없는데, D의 논문을 읽고난 후 가보고 싶은 마음이 50배쯤 더 증폭되었다.)


지금은 비엔나에서 일을 하고있는 D. 그런데 내가 꿈을 꾼 시기에, 실제로 갑자기 루마니아에 볼 일이 생겨 다녀왔었다며 신기해했다. 나의 로망의 도시 중 하나인 비엔나에서 살고 있는 D를 늘 부러워하는데, D에게 비엔나는 (모든 곳이 그렇듯) 마냥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고 한다. 모든 것의, 모든 곳의 이면들.


10월에 만나면 할 말이 많을 것 같다. 마냥 멀게만 느껴졌던 10월이 다가오고 있다.



ii. 

... 질서를 상실한 진실은 허구보다 더 허구적이다. 맹목적 진실 추구는 예술을 창조하지만 동시에 그로테스크한 돌연변이를 낳는다. 

다양성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될 때는 독단이 된다. 맹목적 다양성은 혼란과 무질서, 방종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반면 유일성이 독단의 누명을 벗으면 합리적 흑, 합리적 백이 된다. 뒤에서 보면 앞이 뒤인 것처럼, 뒷모습과 앞모습도 서로 교차하기 때문이다. ... 나를 찾아가는 여행은 일종의 '삭제 게임'이다. 강요되거나 미혹된 앞모습들을 지워나간다.  


... 따라서 의미의 죽음은 의미 상실에 있지 않다. 그것은 의미의 부재가 아니라 의미의 혼돈으로 인한 왜곡된 의미에의 고착에 있다. 


... 그러므로 바른 길은 '내려놓기'가 아니라 '바로잡기'다. '멈춰 서기'가 아니고 '제대로 가기'다. 또한 '무소유'나 '최소한의 소유'가 아닌 '건전한 소유'이고 '비우기'가 아닌 '제대로 채우기'다. 


... 실체(substance)는 어원적으로 'sub(under)'+stantia(stand)', 즉 '모든 만물의 밑에서 만물이 존재하도록 그 토대와 근원이 되어주는 존재'라는 뜻이다. 모든 존재의 존재근거가 된다면 자기 자신은 다른 무엇의 도움이 필요 없는 스스로의 존재여야 한다. 스피노자는 이를 '자기 스스로의 존재원인이 되는 존재(causa sui)'라고 말한다. 


... 누구나 자본을 주인으로 섬긴다. 그래서 요즘은 자본에 의한 인격 상실이 문제가 아니다. 자본을 위한 인격의 자발적 포기가 더 문제다.


... 유토피아에 대한 기대도 사라졌다. 단지 말레비치와 함께 '고도(Godot)'를 기다리고 있다. 신(God)이든 멍청이(Idiot)든, 그 존재가 누구인지는 관심 없다. 언제 올지, 정말 오기는 할지도 모르고 기다리며, 기다림은 행복으로 간주된다. ... 사실 엄밀히 말하면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다.


... 아무리 그러지 않으려 해도, 그러지 않는 자신의 의가 쌓인다. 어떠한 경우에건 '나'를 벗어날 수 없다. '나'의 없음을 깨달아도, 그렇게 깨달은 존재가 결국 '나'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 죽음에서 생명으로', 김봉규



iii. 




음... 시간을 거슬려 무엇을 되돌릴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해봐도 바꾸고 싶은 것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몇몇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어쩌면 조금 더 현명(?)한 질문과 답변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다한들 결과가 드라마틱하게 바뀌지 않을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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